20세기 음악계를 뒤흔든 ‘가짜 작곡가’ 논란의 중심에 선 명곡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는 오늘날 클래식 애호가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한 곡이다. 신비롭고 애절한 선율은 결혼식, 추모 행사, 각종 영상 배경음악으로도 자주 쓰이며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곡의 탄생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음악계의 반전 드라마가 숨어 있다.
사실 이 곡의 진짜 작곡자는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 1551~1618)가 아니다. 오히려 이 곡은 그가 죽고 수백 년이 흐른 뒤, 20세기 소련에서 작곡된 곡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곡이 16세기 이탈리아 작곡가의 작품으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카치니가 아닌 바빌로프의 작품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는 1970년대 구소련에서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표 당시에는 "작곡자 미상, 16~17세기 류트 음악"이라는 설명이 붙은 음반으로 유통되었는데, 그 안에 이 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음반의 진짜 작곡자는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블라디미르 바빌로프(Vladimir Vavilov, 19251973)였다. 그는 류트와 기타 연주자이자 바로크 음악 연구가로 활동하면서, 고음악을 흉내 내거나 모방해 자작곡을 쓰고는 익명으로 발표하곤 했다.
왜 자신이 작곡한 곡을 굳이 이름 없이 발표했을까?
바빌로프는 자신의 음악이 시대적 분위기나 이름 때문에 무시되지 않고 널리 알려지길 바랐다. 고전 작곡가의 이름으로 곡을 발표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전략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그가 남긴 여러 곡은 당시 "고음악 복원작"이라는 이름으로 소련 국영 음반사에서 출시되었으며, 청중들은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친구의 ‘선의의 거짓말’로 인해 진실이 덮이다
바빌로프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975년, 그의 친구이자 오르가니스트였던 마크 샤킨(Mark Shakhin)이 이 곡을 ‘카치니의 작품’이라고 명시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카치니는 실제로 16세기 후반 피렌체에서 활약한 작곡가였고, 바로크 초기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의 이름이 붙은 이 곡은 바로 그 시절의 정서와 유사한 듯 보였고, 자연스럽게 진짜처럼 여겨졌다.
그 뒤로 수많은 성악가들이 이 곡을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네트 다스흐, 조수미, 이자벨 바이어 등의 세계적 성악가들이 레퍼토리에 포함시켰고, 국내외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도 널리 퍼졌다. 곡의 아름다움과 인기 덕분에 진실은 오랫동안 관심 밖에 머물렀다.
진실은 밝혀졌지만, 여전히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
이후 음악학자들의 분석과 기록 조사, 당시 음반 출처에 대한 추적을 통해 이 곡은 바빌로프의 작품임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전 세계 대부분의 음반과 공연에서는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라는 이름이 붙어 유통되고 있다.
이는 단지 실수의 반복이 아니라, 곡명이 하나의 상징성을 가지게 되면서 브랜드처럼 굳어진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바빌로프의 이름보다 ‘카치니’라는 익숙한 이름이 주는 역사적 권위와 이미지가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바빌로프의 소망은 이뤄졌을까
정작 바빌로프는 이 곡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기 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오해 속에서 오히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음악사에서는 드물게, 자신의 이름 없이도 후대에 큰 영향을 준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될 만하다.
진실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로 불리는 이 곡. 그러나 이제는 그 이름 뒤에 숨겨진 진짜 작곡가 바빌로프의 이야기를 함께 기억하는 것이 음악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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